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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 이제는 아름다운 기억으로만 남은 이름

by 탓픽 2025. 4. 17.

 

스물셋이던 나에게
스물일곱의 그녀는 조금 높은 곳에 있는 별 같았다.
조금 더 어른스럽고,
조금 더 단단해 보였고,
그만큼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영미.
그녀를 처음 본 건 친구의 생일 모임이었다.
검정 셔츠에 짙은 립스틱,
그리고 조용히 미소 지으며 와인을 마시던 그 모습.
처음부터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말 한 마디, 눈짓 하나에도 묘한 여유와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내가 어린 티를 팍팍 내며 쉴 새 없이 말을 할 때에도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주었다.
그 눈빛엔 흘려보내는 무관심이 아니라
진심으로 듣고 있다는 따뜻함이 있었다.

그 후, 우리는 몇 번의 약속 끝에 자연스럽게 만남을 시작했다.
영미는 나를 ‘귀엽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자존심을 건드리면서도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어린 나를 보듬듯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은
세상의 모든 걱정을 잠시 잊게 만들었다.

그녀는 커피를 좋아했고,
비 오는 날을 사랑했다.
책을 많이 읽었고,
감정을 조용히 꾹꾹 눌러 담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 감정을 읽으려 애썼고,
조금 더 성숙해 보이기 위해 허세도 부렸다.
하지만 어떤 때는 그녀 앞에서 철없이 굴고 싶었다.
어린 내가 성숙한 사람을 흉내 내기보단
그저 솔직한 나로 있어도 괜찮다고 느끼게 해준 사람.
그게 영미였다.

하지만 사랑에도 계절이 있다면,
우리의 계절은 가을이었다.
짧고 아름답고,
조금은 쓸쓸하게 스쳐 지나갔다.

나와 그녀의 삶은 너무 달랐다.
일과 인간관계, 가치관과 미래에 대한 그림까지.
우리는 서로를 사랑했지만
서로를 오래 붙들 순 없었다.

이별은 조용했다.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다가
그녀가 말했다.
“이 사랑은… 나중에 생각하면 예뻤다 싶을 거야.”

그 말이 맞았다.
세월이 흘러,
나도 누군가를 만나고
그녀도 어디선가 자신의 삶을 잘 살아가고 있겠지만,
가끔 그날의 커피 향,
비 오는 오후,
책장 넘기는 소리 같은 것들이
문득 그녀를 떠올리게 한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영미는 나에게 단지 연인이 아닌,
어떤 기억의 결 같은 사람이었다.
한 사람을 떠올릴 때
이토록 마음이 따뜻해질 수 있다는 걸
나는 영미를 통해 처음 알았다.

이제 그녀를 사랑하진 않지만,
그녀를 기억하는 건 늘 포근하다.
영미,
그 이름은 더 이상 아프지 않은
아름다운 기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