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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의 자밀라 – 이루어질 수 없기에 더 아름다웠던 인연

by 탓픽 2025. 4. 15.

 

그녀의 이름은 자밀라였다.
처음 듣자마자 내 입안에서 고요히 울리는 그 이름,
낯설면서도 묘하게 익숙한 소리.
햇빛이 따사롭게 내려앉던 어느 늦여름,
나는 그 이름과 함께 한 여인을 마음 깊이 담게 되었다.

스리랑카.
그 땅은 내게 낯선 여행지였다.
태국이나 발리처럼 유명한 관광지도 아니었고,
누구도 적극 추천하지 않았던 그곳에
나는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듯 발을 디뎠다.

작은 마을, 담발라에서의 어느 날.
나는 뜨거운 햇살을 피해 들어간 찻집에서
자밀라를 처음 만났다.
하얀 린넨 원피스를 입고,
작은 찻잔을 닦던 그녀는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짧은 미소.
그 미소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고,
뭔가 잊고 지내던 감정을 일깨우는 듯했다.

우리는 몇 마디 말도 없이 차를 마셨고,
그날 이후 나는 매일 그 찻집을 찾았다.
그녀는 내가 머물던 마을의 작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일을 마친 그녀는 늘 찻집에 들러 잠깐씩 일을 도왔고,
나는 그 시간이 되기 전까지 찻집 한쪽 창가에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우리는 말을 많이 나누진 않았다.
그녀는 영어가 서툴렀고,
나는 싱할라어는 한마디도 할 줄 몰랐다.
하지만 대화는 필요 없었다.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눈빛과 몸짓으로 느꼈고,
조용한 침묵 속에서도 서로의 마음이 닿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밀라는 많은 걸 말하지 않았다.
자신의 과거도, 미래도,
무엇을 꿈꾸는지조차 얘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늘 따뜻한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어쩌면 그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만남이 오래가지 않으리란 걸.
그녀와 나는,
서로의 세계에서 너무도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었으니까.

나는 돌아가야 했다.
그녀는 떠나지 않았다.
떠날 수도 없었다.
그녀에겐 책임과 삶의 무게,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었고,
나는 그 모든 걸 가볍게 뛰어넘을 만큼 무모한 사랑을 감당할 용기가 없었다.

마지막 날, 나는 그 찻집에서 그녀와 마주 앉았다.
바람이 유난히 따뜻했던 오후였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고,
그녀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우리는 말 대신 모든 것을 나눴다.
그리고… 아무런 약속 없이 서로를 놓아주었다.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 안,
창밖의 풍경은 느리게 흘렀지만
내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지나간 장면들,
찻집의 향기,
자밀라의 눈빛이
끝없이 밀려왔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비 오는 날이면,
홍차 향이 퍼질 때면,
나는 문득 자밀라를 떠올린다.
그녀는 여전히 그 마을에 있을까.
여전히 찻잔을 닦으며
누군가를 위한 미소를 지어주고 있을까.

이루어질 수 없었기에
더 애틋했고,
잡을 수 없었기에
더 오래 남았다.

자밀라.
그 이름은 여전히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한 잎의 홍차처럼 은은하게 우러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