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기억은 계절을 닮는다.
어떤 기억은 한겨울의 바람처럼 아프고,
어떤 기억은 봄 햇살처럼 잔잔하다.
그리고 나에게 나랑칭케는,
언제 떠올려도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이름이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어느 한글 공부방이었다.
나는 자원봉사로 외국인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기초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었고,
그녀는 막 몽골에서 한국에 온 20대 후반의 여성으로
조심스럽게 첫 수업에 들어섰다.
이름을 묻자, 그녀는 약간 머뭇거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랑칭케예요.”
그 낯선 음절들이 어딘지 모르게
부드럽고 맑게 울렸다.
그녀는 뜻을 덧붙였다.
“몽골어로… ‘평온한 별빛’이라는 뜻이에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왠지 모르게 가슴 한켠이 뭉클해졌다.
이름에 담긴 의미처럼,
그녀는 말수는 적지만
항상 차분하고 따뜻한 눈빛을 가진 사람이었다.
수업이 진행될수록
나는 점점 그녀를 의식하게 되었다.
모르는 표현이 나올 때마다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하는 모습,
수줍게 웃으며 “이거… 맞아요?”라고 되묻는 말투,
그리고 수업이 끝난 후
항상 교실 뒤편을 정리하고 나가던 그녀의 뒷모습까지.
우리는 수업이 끝난 후,
가끔씩 따로 만나 대화를 나눴다.
한국말이 조금씩 늘어나자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풀어냈다.
광활한 몽골 초원에서 자란 유년 시절,
이국땅에서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온 이유,
그리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
그녀와 나눈 대화는
언제나 조용했지만 진심이었다.
그녀는 항상 상대방을 다치지 않게 하는 말투를 사용했고,
마치 사람 마음에 손을 얹고 다독이듯
천천히, 그리고 따뜻하게 말을 이어갔다.
하루는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선생님은 참… 조용한 사람이에요.
몽골 사람 같아요.”
그 말이 왠지 모르게 마음 깊이 와 닿았다.
우리는 닮아 있었다.
말보다 마음을 더 많이 전하려 했고,
큰 표현보다는 작은 배려를 소중히 여겼다.
하지만 그렇게 아름답고 평화로웠던 시간도
영원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어느 날 수업이 끝난 뒤
내게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저… 다시 몽골 가야 해요.
엄마가 아파서… 당분간은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아요.”
나는 말없이 그 봉투를 받아들었다.
안에는 그녀가 손으로 꾹꾹 눌러 쓴 편지가 있었다.
삐뚤빼뚤하지만 정성 가득한 글씨.
그리고 마지막 문장.
“선생님 덕분에 한국에서의 기억이 따뜻했어요.
그리고… 제 이름을 예쁘게 불러줘서 고마웠어요.”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그녀를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를 생각하면 슬프지 않다.
오히려 마음이 따뜻해진다.
어딘가에선 분명히,
광활한 초원을 달리는 바람 속에서
그녀는 여전히 평온한 별빛처럼 빛나고 있을 것이다.
나랑칭케.
그 이름을 되뇌는 것만으로도
마음속 어딘가에 불이 들어온다.
조용하고 맑고 따뜻했던
그녀와의 계절이 다시금 살아나는 것만 같다.
내 인생에 스며든 가장 고요한 따뜻함,
그건 아마도 그녀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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