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에 간 건 단지 우유 한 팩 때문이었다.
어느 퇴근길, 텅 빈 냉장고를 채우기 위해 아무 생각 없이 들렀던 동네 대형 마트.
그날 그 시간, 나는 아무 예고 없이
내 일상에 불꽃처럼 스며든 한 사람과 마주쳤다.
그녀는 계산대 앞에서 고추와 생강을 손질 없이 봉지에 담고 있었다.
긴 머리는 자연스럽게 묶여 있었고,
짙지도 연하지도 않은 눈매엔 어딘지 모르게 이국의 정서가 스며 있었다.
하얀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팔, 조심스럽게 물건을 바구니에 넣는 손,
그리고 내게로 날아든 짧은 인사.
“저기… 이거 한국말로 뭐라 해요?”
그녀는 쌀국수용 소스를 가리키며 수줍게 웃었다.
알아보니 그녀는 베트남에서 온 유학생이었고,
잠시 한국에서 머무르며 아르바이트도 하고 한국어도 배우고 있었다.
나는 흔쾌히 소스를 설명해줬고,
그날 이후 이상하리만치 자주 마트에 가게 됐다.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서로의 일상 속에 스며들었다.
마트에서 함께 장을 보고,
그녀가 만든 분짜를 먹으며 맥주 한 잔 기울였고,
벚꽃이 피기 시작한 4월엔 한강을 걸었다.
그녀는 내게 낯선 베트남어 단어를 가르쳐주고,
나는 그녀에게 한국 드라마의 복잡한 감정을 번역해주었다.
사랑이란 게 꼭 거창하거나 극적인 사건에서 시작되진 않는다.
그저 누군가의 말투, 습관, 눈빛에 매일 조금씩 빠져들면서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깊어져 가는 것이다.
그녀와 함께한 날들은 불꽃 같았다.
길지는 않았지만 뜨거웠고,
잠시였지만 강렬했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계절처럼 변했다.
그녀는 유학 기간이 끝나갈 무렵,
조심스레 내게 말했다.
“나는 다시 돌아가야 해요.
고향이, 가족이, 나의 모든 게… 거기 있어요.”
나는 붙잡지 않았다.
그녀 또한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조용히 서로를 바라봤고,
긴 포옹 한 번으로 많은 것을 대신했다.
그녀가 떠난 후, 나는 한동안
마트에 가지 않았다.
장을 보는 것조차
그녀와의 기억을 건드릴까 두려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그곳을 찾았을 때,
나는 그녀가 자주 고르던 소스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괜히 혼잣말로 말했다.
“이건… 쌀국수용이야.”
이따금 한강을 걸을 때,
베트남 길거리 풍경이 나오는 다큐를 볼 때,
나는 여전히 그녀를 떠올린다.
베트남의 봄처럼 따뜻했던 그녀,
짧았지만 내 가슴속에 불꽃처럼 타올랐던 그 사랑.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장바구니 속 기억'을 하나쯤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심코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지 못한 감정 하나,
스쳐 지나간 인연 하나.
나에게 그건,
마트에서 만난 베트남의 그녀였다.
그리고 그 사랑은
지금도 내 마음 한편에서
언제나 봄처럼 피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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