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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

첫사랑은 칠판 위에서 시작되었다 — 그녀는 이제 나의 아내

by 탓픽 2025. 4. 19.

 

고등학교 2학년 봄,
나는 한문 시간만 되면 괜히 책상 앞에 허리를 곧추 세우곤 했다.
문제는, 한문이 재미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녀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하얀 블라우스에 단정한 단발머리,
또박또박 칠판에 붓글씨처럼 글씨를 쓰던
한문 선생님.
처음 본 순간, 나는 생각했다.
‘이게 바로 첫사랑이라는 건가?’

그녀의 이름 석 자는 교무실 문패 위에서 빛났고,
수업 시간마다 그녀가 읊조리던 사자성어들은
내게 이상하게 시처럼 들렸다.
청출어람,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
어느 하나 그냥 흘려보내지 못하고
밤마다 노트에 다시 적어보며 그녀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친구들은 그저 어려운 과목 하나쯤으로 치부했지만
나는 필기를 하며 그녀의 눈동자 움직임까지 기억하려 했다.
가끔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심장이 들켜버릴까 봐 고개를 푹 숙였고,
그 설렘은 시험지보다 더 긴장감을 주었다.

졸업식 날,
그녀에게 아무 말도 못 하고 끝내 교정을 떠났을 때
나는 생각했다.
‘아마 평생 못 잊겠구나.’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오고,
어느덧 사회인이 되어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인생은
때로 믿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간다.

우연히 참석한 친구의 결혼식.
복잡한 인파 속,
멀리서 익숙한 얼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단정한 원피스에 여전히 고운 미소.
그녀였다.

“혹시… ○○고등학교 나오셨어요?”
내가 먼저 말을 걸었고
그녀는 잠시 놀란 듯 하더니 웃으며 말했다.
“너무 오랜만이라 깜짝 놀랐어요. 잘 지내셨어요?”

그날 우리는 그렇게 오래된 교과서를 다시 펼치듯
서로의 과거를 꺼내 놓았다.
학생과 선생이라는 울타리는 이미 사라졌고,
우리는 이제 어른이 되어 같은 시간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이후 우리의 관계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조심스러운 만남, 따뜻한 대화,
그리고 매일의 문자 하나하나가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을 되살려주었다.

결국,
나는 오랜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한문 선생님이던 그녀는
이제 나의 부인이 되었다.

아침마다 그녀는 여전히 깔끔하게 글씨를 쓰고,
나는 그런 그녀를 뒤에서 조용히 바라본다.
때론 퇴근길에 한문 단어 퀴즈를 내주며
우린 웃고 장난친다.
“이건 내가 고등학교 때도 못 맞췄는데…”
“그래서 다시 배우는 거지, 여보.”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
그 말은 우리에겐 해당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 첫사랑은
지금도 내 옆에서,
따뜻한 차를 건네주며 말한다.

“오늘도, 사는 게 한 편의 시 같네.”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그 시, 선생님이 쓰고 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