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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

호주 워킹홀리데이에서 만났던, 지나간 그녀가 그립다

by 탓픽 2025. 4. 11.

 

브리즈번의 여름은 뜨겁고 눈부셨다.
태양은 언제나 정오쯤 마음껏 쏟아지고,
낯선 땅의 바람은 내게
새로운 자유와 두려움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그곳에서 나는
그녀를 만났다.

워킹홀리데이 중이던 어느 날,
같은 농장에서 함께 일하게 된 한국인 여자.
그녀는 선크림을 바르며 익숙한 듯 밀짚모자를 눌러썼고,
고된 일 앞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여기 와보니, 사람보다 하늘이 더 말을 걸어오는 것 같지 않아?”
그녀가 내게 처음 건넨 말은
조금 시적이었고,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녀의 이름은 수진.
이국의 햇살 아래,
어깨에 땀이 맺히는 오후마다
나는 수진과 조금씩 가까워졌다.

저녁이면 우리는 맥주 한 캔씩을 들고 숙소 옆 풀밭에 앉았다.
낯선 하늘에 별이 하나둘 뜨기 시작하면
수진은 조용히 일기를 꺼내 읽듯,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서울에서의 지친 생활,
떠나오던 날의 마음,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살아지는 삶.

나는 말없이 들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바람 같았다.
쓸쓸하면서도 부드럽고,
내 마음 어딘가를 조용히 쓰다듬는 온기를 가졌다.

우리 사이엔 ‘사랑’이라는 이름이
정확히 붙지 않았지만,
누가 봐도 우리는 서로에게 기댔고,
그 밤의 대화와 눈맞춤 속에
묵묵한 애정이 자라고 있었다.

하지만 워킹홀리데이의 끝은
언제나 돌아가야 할 ‘현실’을 동반했다.
나는 예정대로 멜버른으로 옮겨야 했고,
수진은 시드니의 새로운 일자리를 택했다.

우리는 작별 인사 대신
딱 한 번, 포옹을 했다.
긴 말 없이,
서로의 어깨를 토닥이던 그 짧은 순간이
이제 와 생각하면,
가장 길고 깊은 작별의 언어였다.

그 후로 연락은 점점 뜸해졌고,
결국 영영 멈췄다.
나도 일상으로 돌아왔고,
그녀도 아마 자신의 삶에 다시 발을 붙였겠지.

그런데 이상하게,
지금도 어느 여름날
햇빛이 길게 뻗은 오후,
누군가 선크림 냄새를 풍기며 지나가면
나는 불쑥
수진을 떠올린다.

그녀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보고, 누구와 웃고 있을까.
혹시 가끔,
브리즈번의 그 밤을 기억해주는 순간이 있을까.

나는 여전히
그 하늘 아래 함께 앉아 있던 그날을 기억한다.
우리 사이에 이름 붙일 수 없었던 감정이
얼마나 순수하고 따뜻했는지를.

호주의 하늘은 여전히 크고,
그녀는 여전히
내 추억 속 어딘가에서
햇살을 안고 웃고 있다.

그립다, 수진.
이름조차 부르기 아련한 그 계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