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람피워서 헤어졌지만 내게는 그녀뿐이야

 

오늘따라 바람이 차갑다. 창가에 기대어 멀리 보이는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그날의 기억이 밀려온다. 그녀의 얼굴에 번진 눈물과 내가 할 말을 잃고 서 있던 그 순간.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내가 바람피워서 헤어졌지만, 그녀에게는 나뿐이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날을 기억한다. 대학 도서관 구석에서 문학책을 읽고 있던 그녀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창가에 앉아 햇살을 받으며 책에 빠져있는 그녀의 옆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고, 우리는 금세 공통점을 발견했다. 좋아하는 작가, 음악, 영화까지...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연애는 누구보다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학교 앞 작은 카페에서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한강변을 걸으며 미래를 그렸다. 졸업 후에는 작은 아파트를 함께 얻어 동거를 시작했다. 매일 아침 그녀가 준비한 아침 식사로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에는 서로의 하루를 나누며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쌓아갔다.

그녀는 항상 내게 최선을 다했다. 내가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으면 밤늦게까지 기다려 위로해주었고, 내 꿈을 위해 자신의 욕심을 뒤로 미루기도 했다. 그녀의 사랑은 조건이 없었다. 그저 내가 행복하기를 바랐고,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하지만 인간은 참 이상한 존재다. 가까이 있는 행복의 가치를 모르고, 멀리 있는 것을 갈망한다. 3년차에 접어들면서 나는 그녀의 사랑이 당연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매일 같은 일상, 변함없는 그녀의 모습이 때로는 지루하게 다가왔다. 그때 회사에 새로운 여직원이 들어왔다. 화려하고 활기찬 그녀는 내 눈에 새로운 세계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점심을 같이 먹고, 업무를 도와주는 정도였다. 하지만 점차 그 경계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퇴근 후 술 한잔, 주말 만남, 그리고 결국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다.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계속해서 경고음이 울렸지만, 나는 그 소리를 무시했다.

집에 돌아가면 여전히 변함없이 나를 반겨주는 그녀가 있었다. 그녀의 순수한 눈빛을 마주할 때마다 죄책감이 몰려왔지만, 그것조차 무시한 채 거짓말을 이어갔다. "회사에 일이 많아", "팀 회식이 있어", "프로젝트 때문에 야근해야 해"...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았고, 나는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순간에 모든 것이 드러났다. 내 핸드폰에 온 메시지를 그녀가 우연히 보게 된 것이다. 그 순간 그녀의 얼굴에 스친 표정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배신감, 충격, 슬픔, 그리고 깊은 상처... 그녀의 눈에서 모든 빛이 사라진 것 같았다.

"왜?"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어떤 말도 그녀의 상처를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날 밤, 그녀는 아무런 말 없이 짐을 쌌다. 작은 캐리어 하나에 자신의 인생을 담아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비로소 내가 무엇을 잃었는지 깨달았다.

그녀가 떠난 후 집은 텅 비어버렸다. 물리적으로는 그녀의 물건들만 사라졌을 뿐이지만, 정서적으로는 집의 모든 온기가 함께 사라진 것 같았다. 매일 아침 그녀가 내려주던 커피 향기, 저녁에 들려오던 그녀의 웃음소리, 잠들기 전 나누던 소소한 대화... 모든 것이 그리웠다.

회사에서 만나던 여자와의 관계도 오래가지 못했다. 새로운 사랑이 아닌, 단순한 일탈에 불과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녀는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고, 우리 사이에는 진정한 교감이 없었다. 결국 몇 달 후 그 관계도 자연스럽게 끝이 났다.

그렇게 나는 완전한 혼자가 되었다. 내 어리석음과 이기심으로 인해 정말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는 후회가 날마다 나를 괴롭혔다. 몇 번이고 그녀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응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것이 당연했다. 내가 저지른 잘못에 비하면 그녀의 침묵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6개월이 지났을 무렵, 우연히 거리에서 그녀를 마주쳤다. 예전보다 더 말랐지만,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무작정 그녀에게 다가가 사과했다. 모든 것이 내 잘못이었다고,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단호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난 이제 다른 삶을 살고 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동시에 이상하게도 안도감이 찾아왔다. 그녀가 나 없이도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위안이 되었다. 그녀는 내가 상처준 만큼 충분히 슬퍼할 자격이 있었고, 이제는 그 아픔을 딛고 앞으로 나아갈 자격도 있었다.

그 후로 1년이 더 흘렀다. 나는 여전히 혼자지만, 그 시간 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 사랑의 의미, 신뢰의 중요성, 그리고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이었는지... 때로는 깊은 후회와 자책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것이 내가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려 노력했다.

어느 날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그녀를 다시 만났다. 그녀의 옆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깊은 신뢰와 사랑이 느껴졌다. 마치 예전에 그녀가 나를 바라보던 것처럼. 가슴이 아팠지만, 동시에 그녀를 위한 진심 어린 기쁨도 느껴졌다. 그녀는 마땅히 행복해야 할 사람이었으니까.

식장을 나서려는 그녀와 잠시 눈이 마주쳤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그녀의 눈에는 더 이상 예전의 상처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옛 연인을 마주한 평온함만이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녀는 진정으로 나를 떠나보냈고, 새로운 행복을 찾았다는 것을.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밤하늘의 별들이 유난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갑자기 울컥하는 감정에 길가에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은 상실감의 눈물이면서도, 동시에 해방감의 눈물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나 자신을 마주할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내가 바람피워서 헤어졌지만, 그녀에게는 나뿐이었다. 그녀는 순수한 마음으로 나를 사랑했고, 나는 그 사랑을 배신했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후회이자, 가장 값진 교훈이 되었다. 사랑은 소유가 아닌 존중이며, 일시적인 감정이 아닌 매일의 선택이라는 것을.

이제 나는 그녀를 위해 한 가지 바람이 있다. 그녀가 새로 만난 사람과 진정한 행복을 찾길 바란다. 내가 주지 못했던 신뢰와 안정, 변함없는 사랑을 그에게서 받길 바란다. 그리고 절대로 내가 그녀에게 준 상처 같은 것을 경험하지 않기를 바란다.

가끔 그녀의 웃는 모습을 떠올리면 여전히 가슴이 아리다. 하지만 그 아픔조차도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사랑했던 사람을 아프게 한 대가로 평생 이 그리움과 후회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어쩌면 인생은 이런 실수와 후회, 그리고 그로부터의 배움으로 이루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바람피워서 헤어졌지만, 그녀에게는 나뿐이었다는 사실. 그 진실을 가슴에 새기며 나는 오늘도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언젠가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게 된다면, 이번에는 절대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창밖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빗방울이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모습이 마치 내 마음같다. 쓰라린 후회와 그리움, 그리고 그녀를 향한 변함없는 마음. 이제는 사랑이라 부를 수 없는, 그저 먼 곳에서 그녀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

그녀의 웃음소리가 문득 귓가에 맴돈다. 그때 나는 그 웃음의 가치를 알지 못했다. 이제는 너무 늦었지만,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얼마나 소중한 것을 잃었는지, 그리고 그녀가 얼마나 특별한 사람이었는지.

내가 바람피워서 헤어졌지만, 그녀에게는 나뿐이었다. 그 사실이 내 가슴에 영원한 상처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상처를 통해 나는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배우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이 깨달음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길 바란다. 내가 범한 실수를 통해, 다른 누군가는 더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기를.

오늘밤도 나는 그녀를 위한 기도를 한다. 그녀가 지금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고 있든, 행복하기를. 내가 주지 못했던 모든 행복을 찾기를. 그리고 나는 여기서, 그녀를 떠나보내는 법을 배우고 있다. 비록 그 과정이 길고 아프더라도, 그것이 내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의 형태일 것이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계절은 변한다. 그녀의 기억도 언젠가는 흐릿해질지 모르지만, 내가 배운 교훈만큼은 영원히 내 안에 남아있을 것이다. 내가 바람피워서 헤어졌지만, 그녀에게는 나뿐이었다. 그 사실을 절대 잊지 않으며, 나는 오늘도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한 걸음을 내딛는다.

창밖의 비가 그치고, 어느새 달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다. 같은 하늘 아래, 그녀도 이 달을 보고 있을까? 이제는 다른 사람의 품에서 행복을 찾은 그녀. 나는 그 행복을 마음 깊이 축복한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모습일 테니까.

내가 바람피워서 헤어졌지만, 그녀에게는 나뿐이었다. 그 사실이 내 평생의 교훈이자, 가장 아픈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값진 성장의 순간이기도 하다. 잃어버린 사랑의 의미를 뒤늦게 깨달은 나는, 이제 그 의미를 가슴에 새기며 살아간다. 비록 그녀는 내 곁에 없지만, 그녀가 가르쳐준 진정한 사랑의 의미는 영원히 내 안에 남아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