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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

길 위에서 스쳐간 인연, 다시 찾을 수 있을까

by 탓픽 2025. 3. 22.

 

낯선 나라에서 만난 익숙한 사람

배낭을 메고 유럽 곳곳을 떠돌던 여행의 끝자락, 나는 스페인의 한적한 마을에서 그녀를 만났다. 오래된 건물과 좁은 골목길이 어우러진 곳, 바르셀로나에서 기차를 타고 몇 시간 동안 달려 도착한 작은 도시였다.

호스텔 로비에서 체크인을 마친 후, 나는 공용 주방에서 컵라면을 꺼내 들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기름진 음식에 질릴 때가 있는데, 그럴 때 한국에서 가져온 컵라면은 가장 소중한 보물처럼 느껴진다.

그때였다.

"어? 한국 분이세요?"

낯익은 언어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긴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커다란 배낭을 맨 그녀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한국에서 왔어요."

그녀는 반갑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내 옆에 앉았다.

"와, 여기에서 한국인을 만날 줄은 몰랐어요. 저도 배낭여행 중이에요."

그렇게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언제 여행을 떠났는지, 앞으로 어디를 갈 예정인지. 낯선 땅에서 만난 동향인이라는 공통점 덕분에 대화는 금세 깊어졌다.

그녀의 이름은 지윤이었다. 나보다 한 살 어렸고, 몇 개월 전부터 유럽을 여행 중이라고 했다. 우리는 공교롭게도 다음 목적지도 같았고, 결국 며칠 동안 동행하기로 했다.

함께한 시간, 그리고 쌓여가는 감정

우리는 마치 오랜 친구처럼 함께 여행했다. 좁은 골목을 걸으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노천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정리했다.

어느 날은 스페인의 작은 해변에서 늦은 밤까지 이야기를 나누며 파도 소리를 들었고, 또 어느 날은 낯선 도시에 도착해 숙소를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매기도 했다.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그녀에게 점점 더 끌렸다. 처음에는 단순한 여행 동료라고 생각했지만, 언젠가부터 그녀와의 하루가 기대되기 시작했다.

그녀가 작은 일에 웃을 때면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괜히 마음이 쓰였다.

"우리 여행 끝나고 한국 가서도 연락할 수 있겠지?"

어느 날 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줄은 그때는 몰랐다.

사소한 다툼,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이별

이탈리아의 한 도시에서 일이 터졌다.

기차를 타고 다음 도시로 이동하던 날, 우리는 표를 예약하는 과정에서 의견 차이를 보였다. 나는 미리 예약해두자고 했지만, 그녀는 즉흥적으로 움직이고 싶다고 했다.

"너무 계획대로만 하면 재미없잖아. 가서 결정하면 되지 않아?"

"하지만 좌석이 없을 수도 있잖아. 낯선 곳에서 표가 없으면 곤란할 수도 있고."

"넌 왜 그렇게 걱정이 많아? 여행은 좀 자유롭게 하는 게 좋지 않아?"

그녀의 말에 나는 순간 기분이 상했다.

"난 현실적인 거야. 그리고 우리가 같이 다니니까 최소한의 계획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

"그러면 네 방식대로 해. 난 그냥 내 방식대로 할게."

말을 마친 그녀는 가방을 들고 기차역을 나가버렸다. 나는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날 이후, 우리는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

연락처 하나 없이 떠나간 그녀

며칠 후, 나는 같은 도시에 있었지만 그녀를 다시 찾을 수 없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우리가 다시 마주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현실을 깨닫게 됐다.

그녀와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여행 중이라 SNS도 주고받지 않았고, 번호도 교환하지 않았다. 우리는 마치 여행지에서 우연히 마주친 타인처럼, 그렇게 헤어졌다.

나는 우리가 머물렀던 숙소 근처를 돌아다니며 그녀를 찾아보았지만, 그녀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무리 작은 도시라도, 한 번 엇갈리면 다시 마주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무사히 여행을 마쳤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도 남아 있는 후회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나는 가끔 그녀를 떠올렸다.

만약 그날 조금 더 차분하게 이야기했더라면?

만약 내가 한 걸음 먼저 다가가 그녀를 붙잡았더라면?

이런 후회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무리 찾아도 그녀의 흔적은 없었다. 여행자들끼리는 연락처를 주고받지 않는 경우가 많고, 그녀도 SNS를 잘 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찾을 방법이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여행이 끝남과 동시에 서로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녀도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나는 가끔 생각한다.

그녀도 나처럼 가끔 나를 떠올릴까?

혹시 같은 후회를 하고 있을까?

아니면, 나와의 여행은 그녀에게 그저 지나가는 작은 에피소드였을까?

지금은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는 그 여행을, 그리고 그녀와 함께한 순간들을 절대 잊지 못할 거라는 것이다.

그녀가 어디에 있든, 어떤 삶을 살고 있든, 나는 여전히 그녀의 행복을 바란다.

비록 다시 만날 수 없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진짜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