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도 숨 쉴 틈이 필요하다면, 50대의 사랑은 마침내 그 여유를 얻은 계절 같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 속에서 분주히 달리고, 애타게 찾고, 때론 부딪히고 무너지며 지나온 시간 끝에 도달한 이 사랑은 말 그대로 ‘한가하다’. 그러나 그 한가함은 공허함이 아니라 충만함에서 비롯된 여유다.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을 놓쳐도 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느긋한 사랑. 50대의 사랑은 그렇게, 조용하지만 깊게 흘러간다.
그와 나는 어느 오후처럼 자연스럽게 만났다. 특별한 설렘이나 드라마 같은 만남은 없었다. 오히려 조용히 곁을 내어주는 느낌이었다. 더는 누군가에게 나를 증명하려 들지 않아도 되고, 그 사람의 마음을 애써 확인받으려 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 그냥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같은 속도로 걷는 사람. 그것이 우리 사이의 시작이었다.
커피 한 잔에 1시간을 앉아 있을 수 있고,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공기가 편안한 사람.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하루가 덜 피곤해지는 사람.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아도, 충분히 느껴지는 마음. 그런 사랑이 50대에는 가능하다. 우리는 젊을 때처럼 서로의 전부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대신 서로의 하루 끝자락을 나눌 수 있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어느 날 저녁, 평소처럼 조용히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 그는 반찬 하나를 내 접시에 조심스럽게 덜어주며 말했다. “이거 좋아했지?” 그 한마디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젊은 시절이었다면 그 말을 당연하게 여겼겠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기억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 안다. 기억해주는 것, 챙겨주는 것, 배려하는 것이야말로 50대의 사랑에서는 가장 깊은 언어다.
젊은 사랑이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배였다면, 지금의 사랑은 잔잔한 강 위의 나룻배 같다. 급하지 않고, 요란하지 않고, 어느새 곁에 스며드는 속도. 흘러가다 보면 서로의 호흡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맞아 있는지 깨닫는다. 그렇게 우리는 어느새 함께 늙어가고 있었다. 늙어간다는 말이 두렵지 않게 된 것도, 어쩌면 그의 따뜻한 존재 덕분일지 모른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처음’의 떨림보다 ‘오래’의 위안이 더 중요하다. 다시는 사랑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시절을 지나, 이렇게 평온하게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고 있다는 것이 새삼 감사하게 느껴진다. 삶의 풍파 속에서 서로가 마지막 남은 안식처가 되어주는 것. 그게 50대의 사랑이다. 감정의 불꽃은 잦아들었지만, 그 대신 그루터기처럼 깊게 자리한 신뢰와 정이 있다.
함께 책을 읽고, 마트에 가고, TV 드라마를 보며 소소한 감상을 나누고, 어느 날은 아무런 계획 없이 산책을 한다. 그런 평범한 일상 속에 우리 사랑은 자라고 있다. 젊을 때는 그런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런 일상들이 가장 소중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가, 가장 완벽한 하루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됐다.
50대의 사랑은 더는 무언가를 이뤄야 하는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놓아주는 사랑, 기다려주는 사랑이다. 그는 내 과거를 묻지 않았고, 나는 그의 상처를 들추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서로의 지금을 바라봤고, 함께할 미래에 대해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그 미래가 반드시 함께여야만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함께라면 더 좋겠다고 믿는다. 그것이 바로, 강요 없는 사랑의 형태다.
우리는 서로의 하루에 조금 늦게 도착했지만, 그래서 더 천천히 서로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이전의 사랑이 열정과 욕망이었다면, 지금의 사랑은 이해와 존중이다. 이전엔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컸다면, 지금은 ‘편안함을 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이 나이의 사랑은 그런 것이다. 내가 너의 삶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고 싶다는, 조용하지만 깊은 바람.
어쩌면 50대의 사랑은 인생에서 가장 따뜻한 선물일지 모른다. 소란스럽지 않고, 조용하지만 확실한 존재. 내 옆에 앉아 있는 그 사람이 나를 더 이상 젊게 만들지 않아도 좋다. 대신, 나의 오늘을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사람. 그게 지금 내 사랑의 얼굴이다.
그리고 나는 이 한가한 사랑이 너무 좋다. 아무 일도 없는 하루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저녁이, 그리고 그 모든 순간에 조용히 곁에 있는 그가. 이 평범하고 조용한 시간이, 내가 살아온 모든 사랑 중 가장 깊고 진한 사랑임을 안다. 이제는 사랑도, 인생도 그렇게 천천히, 단단하게, 오래도록 함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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