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모스크바의 겨울은 어김없이 눈으로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코트 깃을 세우고 바쁜 걸음으로 거리를 지났고, 나는 혼자 붉은광장 근처의 조그마한 카페에 앉아 있었다. 유학 중이던 나는 러시아어 실력도 변변치 않았고, 주변 사람들과 깊은 인연을 맺을 만큼 여유도 없었다. 어색한 말투, 생소한 습관, 눈덮인 거리에서의 외로움은 매일 나를 삼켜들었다. 그날따라 유독 커피가 쓰게 느껴지던 오후, 그녀가 내 앞자리에 앉았다. 아무 말도 없이, 조심스럽게 한 장의 책을 펼쳐 들고.
이름도 모른 채 시작된 인연이었다. 그녀는 가느다란 손으로 책장을 넘겼고, 나는 마치 숨소리도 들킬까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금발의 머리는 반쯤 묶여 있었고, 회색빛 코트는 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어울렸다. 그런 그녀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나를 슬쩍 바라봤다. 놀라움과 미소가 교차된 눈빛, 그리고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건넨 인사. "Здравствуйте."
나는 어색하게 "Здравствуйте…"를 따라했고, 그녀는 그 말에 작게 웃었다. 짧은 러시아어 인사 한마디가 그렇게 우리 사이를 이었다. 그녀는 내가 외국인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본 듯했다. 어설픈 발음, 동양인의 얼굴, 낯선 눈빛. 그럼에도 그녀는 나를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말을 이어갔다. 나는 겨우겨우 알아듣는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그런 내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았다. 이름을 묻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그 질문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묻지 않은 이름은 끝내 알지 못한 채, 우리의 만남은 이어졌다.
그녀와의 만남은 이상하리만치 규칙적이었다. 매주 수요일 오후 세 시, 같은 자리, 같은 테이블. 그녀는 언제나 내가 먼저 앉아 있기를 기다리지 않았고, 마치 약속이라도 된 듯 내 맞은편에 조용히 앉았다.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었다. 때로는 같은 책을 읽었고, 때로는 창밖을 바라봤으며, 어떤 날은 그냥 서로의 존재만으로 시간을 보냈다. 말이 없어도 좋았다. 그녀와 있는 시간만큼은 외롭지 않았고, 차가운 도시 속에서도 마음은 따뜻했다.
나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거의 몰랐다.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다만 그녀가 고전문학을 좋아했고, 음악을 자주 들었으며, 혼자만의 시간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 정도. 그녀는 종종 이어폰을 나에게 건넸다. 낯선 러시아 음악, 우울하면서도 아름다운 선율, 때로는 삶의 고단함이 녹아든 듯한 음색. 나는 그 음악 속에서 그녀를 이해하려 했다. 이름 대신 노래, 말 대신 눈빛.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조금씩 알아갔다.
가끔은 바람이 몹시 부는 날에도 그녀는 나타났다. 눈이 펑펑 쏟아져 길이 보이지 않는 날에도. 그런 날이면 그녀의 손은 유독 차가웠고, 나는 괜히 자신의 손을 내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은 끝내 조심스러움 속에 감춰졌다. 우리는 사랑을 말하지 않았고, 마음을 표현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 시간 자체로 감정을 대신했다.
한 번은 내가 그녀에게 한국에 대해 얘기해준 적이 있다. 어린 시절 뛰놀던 골목,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던 김치찌개, 설날의 풍경. 그녀는 신기하다는 듯 들었고, 간혹 짧은 한국말을 따라 하기도 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던 그녀의 목소리는 지금도 내 귓가에 또렷하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조심스럽게 나에게 러시아 시 한 구절을 읽어주었다. 안나 아흐마토바의 시였다. 나는 그 시의 뜻을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만으로도 그 시가 어떤 감정으로 쓰였는지 느낄 수 있었다. 슬픔, 그리고 따뜻함. 아마 그것은 그녀가 나에게 전하고 싶었던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평소처럼 카페에 앉아 기다렸지만, 그녀는 오지 않았다. 하루, 이틀,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지만 그녀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걱정과 불안이 교차했고, 나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연락할 수 없다는 사실이 절절하게 아팠다. 이름도, 전화번호도, SNS도. 나는 그녀를 찾아낼 단 하나의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내가 알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좋아하던 책과 음악, 그녀가 웃을 때 살짝 찡그리던 눈꼬리, 그리고 따뜻한 커피를 마시기 전 입김을 내뿜던 그 순간들뿐이었다.
시간이 흘러 유학 생활이 끝나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짐을 정리하면서 발견한 건, 그녀가 어느 날 내게 건넸던 시 한 편이 적힌 작은 종이였다. 고풍스러운 러시아어 필체로 적힌 시는 아직도 해석되지 않은 문장처럼 나에게 남아 있다. 나는 아직도 그 시의 전체 의미를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손글씨를 따라가다 보면, 그 속에서 그녀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름을 알지 못했기에, 그녀는 나에게 더욱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존재는 흐릿하지만, 감정은 선명한 사랑. 그것이 나와 그녀의 이야기였다.
이제 나는 한국의 어느 카페에 앉아, 그 시절을 떠올린다. 러시아의 차가운 바람, 따뜻했던 눈빛, 말 없는 대화, 그리고 매주 수요일의 기다림. 그녀는 내 인생에서 가장 짧고도 길었던 만남이었다.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인연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는 관계.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겨울 그녀가 내 삶에 스며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감정은 시간과 거리에도 지워지지 않았다.
러시아에서 온 이름 모를 그녀. 나는 아직도 너의 이름이 궁금하다. 하지만 이름이 없기에, 너는 나의 기억 속에서 더욱 특별하게 남는다.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혹시, 너도 가끔은 나를 떠올려 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삶 속에서, 조용한 한 페이지로 남는다. 눈 내리던 그날처럼. 아무 말 없이, 그러나 잊을 수 없는 장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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