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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

룸에서 만난 그녀

by 탓픽 2025.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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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조명 아래,
낯선 음악이 흐르고,
술잔은 쉬지 않고 돌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평소와 다르지 않게
지친 하루의 끝을 달래기 위해 친구들과 룸에 들렀다.
큰 기대 없이, 무심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었고
그녀는 조용히 내 옆에 앉았다.

이름도 먼저 묻지 않았고
억지로 웃지도 않았다.
그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며,
가볍게 술잔을 내밀었다.

“오늘, 좀 피곤해 보이시네요.”

낯설게 다정한 말투였다.
형식적인 인사였을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날따라 그 말이
유독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말 하나, 표정 하나에
나는 천천히 귀 기울이게 되었고,
조금씩 조금씩,
그녀 안에 있는 사람 냄새를 발견해갔다.


그녀는 웃을 때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술잔을 채우며
사람들의 말에 적당히 반응하고 웃었지만,
그 웃음 뒤에 감춰진 고요함이
오히려 더 깊게 느껴졌다.

내가 “여기, 일 오래 하셨어요?”라고 물었을 때,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했어요. 생각보다.”

그 말 속에는
많은 사연과 밤들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 순간,
그녀를 ‘종업원’이 아니라
하나의 ‘사람’으로 보기 시작했다.


며칠 후, 다시 그곳을 찾았다.
그녀가 있다는 확신은 없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왠지 다시 마주치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거기에 있었다.
처음처럼 조용히, 익숙한 미소로 내 앞에 앉았다.

“또 오셨어요?”
“그냥… 좀 생각나서요.”

그 뒤로 우리는 몇 번이고 마주쳤다.
룸 안에서,
혹은 문밖 근처의 짧은 담배 휴식 시간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씩 들려주었다.
어릴 때 꿈은 미용사였고,
한 번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 적도 있었고,
지금은 그냥,
조용히 살아가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이상하게 마음이 조용해졌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가 잠시 머물 수 있는
쉼표 같은 존재가 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연인이 아니었다.
공식적으로 손을 잡은 적도 없고,
서로의 집을 방문한 적도 없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녀가 다른 손님에게 웃고 있을 때
이상하게 마음이 아려왔다.

그리고 그 감정은,
분명 사랑이라는 단어와 멀지 않았다.


어느 날, 그녀는 말했다.

“나… 이 일 그만두려고 해요.”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축하해야 할지, 아쉬워해야 할지,
그 어떤 감정도 정리되지 않은 채,
그녀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다시는 못 보겠네요.”
“그래도, 나는 기억할게요.”

그녀는 마지막으로 내게 웃어주었다.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 뒷모습은 참 단단하면서도 외로워 보였다.


그 후로 우리는 연락하지 않았다.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행복한지, 힘들지는 않은지
그 어떤 정보도 모르지만,
가끔 어느 밤,
낮은 조명 아래 술잔이 빛날 때면
그녀의 웃음이 떠오른다.

그건 짧고 조용한 사랑이었다.
이름도, 끝도 불분명했지만
그 감정만은 분명히 존재했다.

룸이라는 공간 안에서
우연히 스친 인연,
그곳에서 피어난 마음.

그녀는 내게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라
그 시절 내 외로움을 감싸주던
작은 위로이자, 조용한 사랑이었다.

그 사랑은 소리 없이 스쳤고,
지금도 조용히 내 기억 속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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