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여름, 그때의 나는 단순한 일상 속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수업은 지루했고, 시험공부는 지긋지긋했으며, 특별한 일 없이 흘러가는 하루하루가 따분했다. 그나마 즐거운 것이라고는 쉬는 시간마다 친구들과 농구를 하거나, 점심시간을 기다리며 매점에 줄 서는 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해 여름, 내 삶에 한순간 강렬한 빛이 스며들었다. 그건 바로, 교생 선생님이었다.
첫 만남, 선생님이 아닌 ‘여자’로 다가온 사람
6월의 어느 날, 3층 복도에 새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단정한 치마를 입은 그녀가 서 있었다. 교무실에서 나오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단정한 단발머리, 온화한 미소, 그리고 책을 품에 안고 서 있는 모습까지.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이 사람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놓을 거라는 걸.
곧 교실로 들어온 그녀는 칠판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안녕하세요, 4주 동안 여러분과 함께할 교생 선생님, 김지윤입니다."
목소리는 차분했고, 교탁 앞에 서 있는 모습은 어색하지만 어딘가 설렘을 불러일으키는 분위기가 있었다. 나는 한동안 그녀의 이름을 머릿속에서 되뇌었다. 김지윤.
그저 수많은 선생님들 중 한 명일 뿐인데, 왜 그렇게 이름 하나까지도 특별하게 느껴졌을까?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시간들
수업 시간, 나는 전보다 앞쪽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교생 선생님이 영어를 가르칠 때면, 그녀의 목소리에 집중하며 공책에 의미 없는 낙서를 했다. 책 속의 단어들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 대신, 그녀의 손끝이 움직이는 모습, 칠판에 글씨를 적는 모습만 눈에 들어왔다.
쉬는 시간이 되면 친구들은 늘 장난스럽게 물었다.
"야, 너 왜 이렇게 집중하냐? 영어가 그렇게 재밌냐?"
"몰라. 그냥..."
대답을 얼버무리면서도, 나는 속으로 웃었다. 내 마음을 들키면 안 될 것 같아서.
점심시간에는 일부러 그녀가 앉아 있는 교무실 근처를 지나쳤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뿐인데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때로는 복도에서 마주쳐 눈을 마주칠 때면, 그녀는 늘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인사했다.
"밥은 잘 먹었어요?"
그 짧은 한마디에 온몸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나는 이미 너무 깊이 빠져버린 걸지도 몰랐다.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고 싶어서
교생 선생님이 오신 이후, 나는 전보다 수업에 열심히 참여했다. 발표를 할 때면 자연스럽게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가 질문하면 일부러 손을 들었다.
어느 날, 쉬는 시간에 그녀가 내 자리로 다가왔다.
"이번 수행평가 준비는 잘하고 있어요?"
가까이서 본 그녀는 더욱 아름다웠다. 향긋한 샴푸 냄새가 어렴풋이 풍겨왔고, 그녀의 눈빛은 따뜻했다.
"아... 네. 조금 어렵긴 한데, 괜찮아요."
사실 전혀 괜찮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하지만 그녀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세요."
그날 밤, 나는 그녀가 한 말을 계속 떠올렸다.
언제든 물어보세요.
그 한마디가 마치 특별한 약속처럼 느껴졌다.
사랑일까, 단순한 동경일까?
나는 알고 있었다.
이 감정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걸.
하지만 마음이란 그렇게 쉽게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웃을 때면 나도 덩달아 행복했고, 그녀가 교실을 떠나면 아쉬웠다.
그녀가 칠판에 글씨를 쓰는 순간조차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 감정이 단순한 동경인지, 아니면 진짜 사랑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날, 전하지 못한 말
4주라는 시간은 너무나도 빨리 지나갔다.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그녀는 학생들에게 작은 편지를 한 장씩 나눠 주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앞으로도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랄게요."
나는 편지를 받았지만, 그녀에게 내 마음을 전할 용기는 없었다.
혹시라도 어색한 분위기가 될까 봐, 혹시라도 부담을 주는 건 아닐까 봐.
그렇게 마지막 날이 지나가고, 교생 선생님은 떠났다.
나는 혼자 운동장을 걸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그녀를 좋아했던 마음은, 내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는 것을.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사람
그 후로 몇 년이 지나고,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가끔 그 시절을 떠올릴 때면, 여전히 그녀의 미소가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 시절, 나는 너무나 어렸고,
그녀는 내게 있어서 첫사랑 같은 존재였다.
전하지 못한 마음이었지만, 그래서 더 아름다웠던 사랑.
그 여름, 나의 교생 선생님을 향한 짝사랑은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가끔, 그녀가 어디선가 좋은 선생님으로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믿고 싶다.
그 시절의 나는,
정말 그녀를 사랑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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