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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선을 다시 만났을 때, 마음은 그곳에 없었다

by 탓픽 2025.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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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이란 참 묘하다.
기억 속에선 늘 가장 빛나고,
어떤 계절보다 찬란하게 남는다.
내게 그 이름은 재선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그녀를 매일 아침 복도 끝 창가에서 바라보곤 했다.
짧은 단발머리, 조용한 눈빛, 책을 가슴에 안고 걷는 모습.
그 시절의 나는,
그녀를 마주칠 때마다 세상이 조금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말도 제대로 걸지 못한 채
어색한 인사 한 마디에 온종일 심장이 뛰던 나날들.

졸업 후 우리는 다른 대학에 진학했고
삶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레 연락도 뜸해졌다.
그러다 그녀가 일본으로 유학을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멀어지는 것이 서운했지만,
어쩐지 그 이별이 우리의 마지막일 거란 예감은 들지 않았다.

세월이 흘렀다.
나도 일에 치이고, 생활에 익숙해진 어느 날.
SNS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오랜만이야. 혹시 일본 올 일 있어?”

그녀였다.
놀랍고 설레고… 마음속에 어쩌면 잊지 못했던 감정들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충동처럼
비행기 표를 끊었다.

오사카의 조용한 골목에서
나는 그녀를 다시 만났다.
그녀는 여전히 웃었지만
그 미소엔 그리움이 아닌,
낯섦과 여유가 섞여 있었다.

처음엔 반가웠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어딘가 어긋난 느낌이 짙어졌다.

그녀의 말투는 예전보다 훨씬 빠르고,
내가 기억하던 그 조용하고 섬세한 감성은
어딘지 무디게 변해 있었다.
밥을 먹으면서도 휴대폰을 놓지 않았고,
거리의 풍경보다 자신의 일상 사진을 찍는 데 더 집중했다.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
나는 몇 번이고 그 시절의 재선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눈을 감고 떠올린 그 모습과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너무 달랐다.
변한 건 그녀일까, 아니면 나였을까.

저녁 무렵, 카페에 앉아 조용히 커피를 마시던 그 순간.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내가 사랑했던 건 **‘그때의 재선’**이었다는 걸.
지금의 그녀는
그 시절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걸.

그리고 더 이상,
그 시절의 감정을 강제로 꺼내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도.

돌아오는 비행기 안,
나는 괜히 창밖 구름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그녀는 나름의 시간 속에서 잘 살아왔고,
나 역시 나의 방식으로 살아왔기에
우리는 더 이상 같은 페이지에 있지 않았다.

첫사랑이란 결국,
그 시절의 순수함을 안고
기억 속에서만 영원히 빛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그녀를 내 기억의 어느 창가에 조용히 내려놓는다.
재선.
그 이름은 여전히 아름답지만,
이제는 지나간 계절의 향기로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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